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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광주학생독립운동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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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구소 작성일17-12-27 11:35 조회6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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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구 화정동 중앙공원에 위치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탐(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옆)

 

 

1910년 대한제국을 붕괴시키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일본제국주의는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한국에 대한 20년간의 식민지배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더욱 강력하게 한민족의 독립의식을 제거하고자 했다. 특히 1927년 이후 일본은  중국대륙과 만주지역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면서 동아시아전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본의 우민화 정책과 억압: 일제는 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 제한, 직업교육과 일본어·일본사 교육 등을 실시하였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 금지, 조선인 학생에 대한 무시, 교육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조선 학생들을 억압하였다. 결국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 그리고 우민화정책을 당하면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광주소재 각 고등보통학교(중고통합과정)에는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이 생성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인 학생들에 의한 조선인 학생들의 차별, 무시 역시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

 

국내 좌우합작운동 출현: 1926년 4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융희(순종)의 사망으로 6.10만세운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19년 3.1운동과 달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1926년 연말이 다가오자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내에서는 일본에 의한 자치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흐름은 홍명희, 송진우 등의 여러 지도자들에게도 반영되었고 민흥회 등에 반영된다. 사회주의그룹에서도 정우회선언 등을 통해 분열적 종파주의로부터 좌우합작으로 나아갈 것이 결의된다. 그 결과 1927년 2월 조선일보 이상재
를 회장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를 비롯해 허헌, 김병로, 한용운 등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익-우익의 지도자들의 합작에 의해 민족단일당인 '신간회'가 조직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터지게 되는 1929년의 연초에는 신간회의 지회가 144개, 회원은 3만9천여 명에 달해 각 지역의 청년, 노동, 농민운동을 지도해 갔다.

광주 지역에서도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11월 전남청년연맹에서 광주청년동맹이 분리되어 결성되었다.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의 주요 임원들은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의 배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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