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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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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09-04 20:24 조회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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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 1932년 영보만세운동의 배경과 성격

[2017년 11월 24일 / 제147호]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영보정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전남도의회 경제복지포럼(대표 우승희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항일독립운동 인정을 위한 지역적 운동이 시작됐다.
2015년 8월 12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며 분신 순국한 당시 81세 최현열 선생은 덕진면 영보리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의 아들이었다. 최병수씨가 참여한 영보항일만세운동은 구시대의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산주의 민중봉기로 비하되며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암우리신문은 영암지역의 항일운동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남대학교 김홍길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의 글을 연재한다.

<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3. 1920년대 영암지역 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4. 1930년대 영암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남노농협의회’
  2) 영암 영보정 만세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3)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 사건
  4) 전남운동협의회와 영암지역 항일운동
5. ‘치유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뒤엉킴의 실타래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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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 홍 길 연구실장

1) 전통적 향촌조직과 항일의 기반 
   - 영암의 반촌(班村) 사회와 향촌공동체

일제강점기 이래 영암지역의 사회운동과 근대화과정에는 지역을 연고로 하는 학연(學緣), 지연(地緣), 가문(家門)과 같은 관계망이 존재했다. 영암지역에도 일제강점기에 각종 청년, 농민, 노동자, 학생, 여성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전개되었지만 그러나 영암에는 이전부터 형성되어 지속되던 사회관계망으로서 향촌조직에 기반을 둔 동계(洞契)가 존재했다. 영암지역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가진 계(契)와 중국에서 유입된 유학적 기풍을 기초로 한 향약(鄕約)을 바탕으로 사족세력을 중심으로 동족마을 혹은 반촌마을이 형성 유지되면서, 향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동계조직은 처음에는 사족조직으로 출현했다가 점차 향촌에 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동계(洞契)로 발전한다. 영암에서 대표적인 동계로는 구림대동계를 비롯해 영보대동계, 장암대동계, 은곡대동계, 영암읍의 용흥대동계 등을 꼽을 수 있다. 
왕인과 최지몽의 탄생지이기도 한 구림일대는 동구림과 서구림으로 구분된다. 이곳에는 1565년 구림대동계가 조직되어 향약적 촌락공동체의 전통을 이어왔다. 회사정(會社亭)은 구림대동계의 중심건축물로 1919년 영암지역 3.1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영암읍에 있는 장암정(場岩亭)은 남평문씨 문중의 장암대동계(1677)가 동약(洞約)을 위해 1760년 지은 정자다. 학산면 은곡리 집영재(集英齋)는 은곡대동계의 동각(洞閣)이다. 은곡대동계는 1650년 제주양씨와 해주 오씨 등 몇 개의 사족 중심으로 촌락내 상호부조와 교화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영암읍 용흥리 새실마을의 화수정(花樹亭)은 하동정씨 감찰공파의 재각이다. 1655년 용흥대동계가 정만태(鄭萬泰)를 비롯한 마을 장로들에 의해 결성된 이후 화수정은 용흥동계의 거점이자 배움터로 자리 잡았다. 
덕진면 영보리는 5백년의 역사를 가진 반촌마을이지만, 한국전쟁 때는 무고한 민간인학살이 저질러진 비극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19세기 말 지어진 전통한옥이 많다. 5백년간 지속된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집성촌으로 내동, 서당동, 관곡, 참새굴, 노로동, 솔안, 홍암, 장동리, 운곡, 송석정, 선암, 세류정 등 12개의 부락이 있다. 영보정(永保亭)은 영보대동계의 거점이었다. 그 전신(前身)이 되는 존양사(存養祠)는 세종대 예문관 직제학을 맡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를 기리는 사당이었다. 영보정은 최덕지의 후손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두 문중에 의해 1630년에 세워졌다. 영보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104호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영보정의 편액은 최덕지의 사위 신후경의 3세손으로 강원감사를 지냈던 신희남(愼喜男)의 문하생이던 한석봉의 글씨다. 영보정 좌측에는 전주최씨 문중재실인 합경재(合敬齊)가 있고 그 뒤로는 문종이 최석지에게 하사한 영정 1본과 초본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다. 덕진면 노송리에 있는 거창신씨 문중사우 이우당(二友堂)은 신후경의 아들 신영명이 1470년 세운 건물이다. 이우당 앞에 자리한 송양서원(松陽書院) 역시 영보 대동계의 자료 8편을 보관해왔다. 
조선시대 농촌사회는 사족중심의 지배질서가 확립에 따라 생활공동체 기반의 촌락조직이, 점차 지주제적 형태 및 향약질서의 출현으로, 사족들의 통제 하에 귀속되는 현상을 보인다. 16세기 이후 촌계류(村契類)는 대개 사족중심의 향촌지배질서의 재편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특히 수령권의 촌락에 대한 통제를 방어하려는 성격이었으나 주로 상계에 의해 주도되면서, 사족들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반촌마을 특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식민지 행정권이 집중된 군청소재지와 떨어져 있던 농촌지역의 지역청년들이 향촌공동체의 거점시설을 활용해 청년회 활동, 강습회, 문맹퇴치와 같은 야학회와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강력한 응집력을 보이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영보강습회가 이들 지역을 배움의 전당을 통해 출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2) 식민지 지주제와 소작갈등
영암은 서쪽으로 무안, 목포, 북쪽으로 나주를 거쳐 광주로 연결되고, 동쪽으로 화순, 장흥으로 산악지역이 있고, 남쪽으론 해남, 강진이 위치하는 등 전남 서부지역 6개의 시군으로 둘러 쌓여 있다. 영암과 무안 일대는 고대부터 영산강 하류의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중국대륙이나 일본, 탐라를 비롯해 다도해의 여러 섬들과 연결되는 수륙교통 중심지였다. 
개항이후 목포에 거점을 세운 일본인들은 개항장 주변의 영암, 나주, 무안, 영광, 해남, 강진, 신안, 진도 등을 빠르게 잠식했고, 나주와 광주, 순천 벌교, 보성 등지에 상권을 확장한다. 영암에 일본관리와 교사가 등장한 건 1908년이다. 탁지부가 전주재무감독국 산하 영암재무서에 牛島熊記, 加藤顯一, 杉山信雄를 주사로 파견했고, 영암공립보통학교에는 일본어교사 淺沼禎一(훈도)가 들어왔다. 1910년 영암우편국이 세워지며 滿江常次郞이 서기로 들어와 활동했다. 영암군청에는 경술국치 전후로 牛島熊記, 遠山峻, 佐久間榮 등이 군서기로 들어와 행정기관을 장악했다.
동양척식회사는 1909년 목포지점을 세우고 전남일대에 대한 식민화를 추진했고, 토지조사사업과정에 참여한 목포상인들과 동양척식을 통해 모집된 일본인 이민자들은 전남일대의 많은 농지를 헐값이 분양받았다. 이들은 영암, 목포, 나주, 광주 등지에 농장이나 과수원 등을 세웠다. 일부 일본인들은 목포나 광주, 나주에 본사를 두고 영암, 해남, 무안, 영광 등지의 농장을 경영했다. 
영암에서 가장 먼저 농장을 만든 일본인은 中道淸太郞와 兵頭一雄이다. 이들은 1903년부터 영암, 목포, 무안 일대에서 조선인 농가를 불법으로 매수해 농장을 경영했다. 兵頭一雄은 오사카 출신으로 1909년 佐佐木仙助가 설립한 영암농원(靈巖農園) 지배인이 되고, 일본인상회 중견으로 활동하다 전남도회 의원, 금융조합감사, 소화전기 사장, 영암운수창고주식회사 전무를 지냈다. 
中道淸太郞은 鹿兒島(가고시마) 출신 세관원으로 1895년 인천세관으로 파견되었다가 1897년 목포로 이동했고, 1907년 이후 목포를 깃점으로 무안, 영암, 나주 일대에 농장을 경영했다. 中道淸太郞은 무안, 영암 일대에 농장을 경영했으며, 조선인 소작인들과 불화가 잦았던 지주 중 한명이었다.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은 1905년에 나주 영산포와 영암군에 토지를 매입하면서 호남지역에서 1000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되었다. 伊藤源太郞과 夏目三郞治은 1907년부터 영암에 농장을 세웠다. 夏目三郞治은 1923년에는 북일시종면에서 간석지 40정을 대부받아 개발했고, 1940년에는 삼호면 삼호리 일대의 해수면의 매립을 통한 간척지도 개발했다. 
영암에서 200정보의 농지를 가진 일본인 지주로는 佐木秋生 등이 있고, ㈜田川農事 역시 200정보 이상의 농지를 가진 대농장이었다. 1910년대 이후 1930년대 말까지 대토지 소유 일본인은 高橋種夫, 山野暢子, 木下千重治, 森酒井, 森田太吉, 萱野茂 田中信藏 등이 있다.
1905년 12월 10일 목포에서 세워진 ㈜鎌田産業, 1907년 ㈜東山農事, 1908년 ㈜田川農事 등 농업회사가 연달아 설립된다. 1920년 ㈜福田農事, ㈜朝鮮土地, (합)小柳農園, ㈜東山産業, (합)藤中農場도 영암, 장흥, 강진, 해남, 무안, 함평, 나주 등에 농장을 경영했다. 이들 일본인과 농업회사는 소작계약 증서제도를 통해 불평등한 소작관계를 구조화시켰다. 
영암지역 일본인들은 1920년 7월 18일 영암운수창고를 세웠는데, 한국인 김주우씨를 대표로 내세웠지만 전무이사 兵頭一雄와 함께 藤中米吉, 管原貞吉, 김자명(金子明), 하대두(河大斗) 등이 이사를 맡고, 伊勢伴輔, 高橋種夫 등이 감사로 활동했다. 대주주는 藤中米吉, 佐佐木秋生, 兵頭一雄, 金冑宇, 高橋種夫, 高堂健吾, 管原貞吉, 二木松次郞, 出井仁三 등이 차지했다. 
이 시기에 영암에서 200정보 이상의 농지를 가진 대지주로는 현준호(玄俊鎬), 김성규(金星圭), 박봉래(朴鳳來), 하대두(河大斗), 김현재(金玹載)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박노진(朴魯珍), 조동성(趙東誠), 정재진(鄭在振), 김규홍(金奎洪), 김태현(金台炫), 김용선(金容善), 김동곤(金同坤), 김준원(金俊元),  신갑덕(申甲德), 최현(崔炫), 현영재(玄永宰), 홍세병(洪世柄), 김상섭(金商燮), 김원희(金源喜), 박정업(朴正業, 나주) 등은 영암지방에 30정보에서 100정보 정도의 농지를 가진 지주였다. 한인 지주도 일본지주들의 지주소작관계를 답습했다. 
일본인 중심의 식민지 지주제의 확장, 반봉건적인 지주제의 존속에 따른 고율의 소작료 문제, 소작농 지위의 불안정은 농민의 만성적 빈곤을 초래했다. 1920년대 이후 일본의 농업식민지정책의 확대에 따라 각지에서는 많은 농민들이 일본인 지주와 마름들에 의한 일방적인 소작권 이전이나 토지경작권 박탈에 저항하여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유혁(柳爀/신북면 노산리 출신)은 악덕 지주의 빈번한 소작권 이동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인소작인회를 결성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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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우리신문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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