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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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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09-04 20:26 조회3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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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일 / 제148호]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영보정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전남도의회 경제복지포럼(대표 우승희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항일독립운동 인정을 위한 지역적 운동이 시작됐다.
2015년 8월 12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며 분신 순국한 당시 81세 최현열 선생은 덕진면 영보리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의 아들이었다. 최병수씨가 참여한 영보항일만세운동은 구시대의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산주의 민중봉기로 비하되며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암우리신문은 영암지역의 항일운동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남대학교 김홍길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의 글을 연재한다.

 

<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3. 1920년대 영암지역 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4. 1930년대 영암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남노농협의회’
  2) 영암 영보정 만세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3)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 사건
  4) 전남운동협의회와 영암지역 항일운동
5. ‘치유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뒤엉킴의 실타래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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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홍길 연구실장

3) 3.1운동, 영암청년운동의 발아
영암은 국난 때마다 목숨을 걸고 국난을 헤쳐온 의인이 많은 고장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영암출신 의병장이자 육우당 박흡(朴洽, 구림 출신)이 있었다. 영암출신 한말의병으로는 박사화(朴士化 1880-1912, 이명 朴士弘), 김선중(金善中 1885-1912), 정낙중(鄭洛中 1884-1910), 심남일부대의 후군장이었던 나성화(羅成化, 1881-1910, 이명 羅相集), 박영근(朴永根), 유종환(兪鍾煥), 김치홍(金致洪, 1880-1910), 김성재(金聖載, 1877-1942, 이명 김학선), 유시연(柳時淵, 1864-1909), 추기엽(秋琪燁), 최병손(崔秉巽, 구림유림, 의병), 정관오(鄭官五), 양방매(梁芳梅, 1890-1986, 영암 금정 여성의병), 이복근(李復根,1879-1910), 이덕삼(李德三, 이명 김덕중, 생몰미상) 등을 들수 있다. 나주출신의 곽재구(郭在九, 1889-1932, 나주 봉황, 영암거주)나 최우평(崔羽平, 1878-1908, 나주출신)등도 영암, 나주, 화순, 광주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영암의 양대산 중 하나인 금정면 국사봉은 호남의병운동의 전적지이기도 하다.
영암지역에서는 신학문을 통한 인재양성의 필요성 때문에 근대적 학교가 등장한다. 통감부는 1906년 보통학교령이라 불리는 칙령 44호를 공포하고, 기존에 소학교 명칭을 보통학교로 고치고, 소학교의 심상과 고등과를 폐지하고, 수업연한도 5-6년을 4년으로 단축시켰다. 이런 가운데 1908년 4월 영암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진다. 영암향교는 자체적으로 보통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며 아동들을 교육했으나 화재로 소실되면서 1918연도에 폐지되고 말았다. 한편 1909년 4월 구림대동계는 사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구림대동계를 경영했다. 그후 1917년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3.1운동은 영암지방 항일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영암지역 만세운동은 영암읍과 구림에서 영암장날을 맞추어서 동시에 계획되었다. 영암읍 장터날 만세운동은 박규상, 조극환을 비롯해, 영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인 최민섭, 김봉근, 김영언, 이종구 등이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기획했다. 
박규상(朴奎相)은 서울에서 경성약학전문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영암으로 내려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고, 상인, 학생, 청년, 농민, 면서기, 지식인, 종교인이 망라된 1천여명의 군중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박규상은 징역 1년 6월을 받아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 병을 앓고 옥중 사망했다. 
조극환(曹克煥)은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마친뒤 영암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미곡상을 했고, 3.1운동 당시 영암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태극기, 독립가, 선언서 등을 면서기 정학순(鄭鶴順)과 영암공립보통학교 학생인 최민섭(崔閔燮)과 함께 제작하여 만들고, 영암 장날에 맞추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고, 4월 10일 영암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김봉근, 김영언, 이종구 등은 영암보통학교 기숙사에서 모여 독립운동을 공모하고, 태극기 100매, 목면의 큰 깃발 1본을 제작하고 영암장날에 독립운동시위를 진행할 것을 계획한다. 김영언(金永彦)도 선언서 등의 시위관련 인쇄물을 제작하고 영암공립보통학교 교실에서 배포하고, 이들을 학교운동장과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인솔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최성심(崔聖心)은 동구림 출신으로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동구림리 주민과 함께 마을 청년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구림보통학교에서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외치고, 교실로 들어가 생도들을 군서면 면사무소로 가두시위를 전개하게 하고, 다시 구림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모두 1919년 9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군서기들도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김재홍과 최민섭은 군서면 면서기로 만세운동에 동조하여 독립선언서, 독립가, 태극기, 독립신문 등을 면사무소에 있는 등사판으로 인쇄했다. 최민섭은 1년 6월, 김재홍은 징역 1년을 받았다. 최기준 또한 독립신문, 독립가 등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해 징역 1년을 받았다.


   <표1> 영암지역 3·1운동에 참여 체포자 중 서훈자 및 미서훈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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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역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장흥형무소로 이송되며 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민섭(崔旼燮)은 보안법위반 및 출판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최기준(崔琪焌), 김재홍(金在洪), 박흔홍(朴炘弘), 정학순(鄭鶴順), 조병식((曺秉植), 김민규(金敏奎) 등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김영언(金永彦)은 출판법위반과 제령7호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박판종(朴判宗), 김봉근(金奉根), 유인봉(柳寅奉), 이종구((李鍾謳), 나효균(羅孝均), 이지봉(李枝奉), 천병권(千秉權), 진봉재(陳奉才), 채동팔(蔡東八), 박종련(朴鍾連), 이종구(李鍾謳) 등은 각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김상학(金相鶴)은 징역 5월을 받았다. 이밖에도 박흔홍(朴炘弘), 김학용(金鶴鎔), 정상조(鄭相祚), 조희도(曺喜道), 박성집(朴成集) 등은 4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태형 90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 밖에도 1919년 9월 27일에는 영암읍 교동리에서 문성선(文性善) 등이 항일독립을 목적으로 한 ‘청년회’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일본인 지주를 규탄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고 7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이 사건으로 문성선은 체포되어 2년 5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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