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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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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09-04 20:31 조회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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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영보정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전남도의회 경제복지포럼(대표 우승희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항일독립운동 인정을 위한 지역적 운동이 시작됐다.
2015년 8월 12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며 분신 순국한 당시 81세 최현열 선생은 덕진면 영보리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의 아들이었다. 최병수씨가 참여한 영보항일만세운동은 구시대의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산주의 민중봉기로 비하되며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암우리신문은 영암지역의 항일운동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남대학교 김홍길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의 글을 연재한다

 

 

<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3. 1920년대 영암지역 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4. 1930년대 영암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남노농협의회’
  2) 영암 영보정 만세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3)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 사건
  4) 전남운동협의회와 영암지역 항일운동
5. ‘치유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뒤엉킴의 실타래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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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홍길 연구실장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 직후 전남지방 항일운동가들은 조직의 재건 및 정비에 착수했다. 완도에서는 황동윤(黃同允), 이기홍(李基弘), 조동선(趙東善), 황상남(黃相南), 최창규(崔昌圭), 김옥도(金玉道), 문승수(文升洙) 등이 완도 농민운동을 조직할 지도기관을 모색했다. 해남에서는 동경유학생출신 김홍배(金洪培)가 1932년 10월 귀국해 오문현(吳文鉉), 박태술(朴太述), 김아기(金阿其) 등을 규합해 농민운동 지도기관 설립을 모색했다. 김홍배는 동경반제동맹 계열이라면 황동윤은 나고야지방에서 전협(全協)계열로 활동했다. 이들은 1932년 전남노농협의회가 일경에 발각되고,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조직도 검거되었다는 국내소식을 듣고 각각 귀국했다. 김홍배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로 돌아왔고, 황동윤은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에서 각각 조직원을 규합했다. 김홍배는 오문현(吳文鉉), 김아기(金阿其), 김영식(金永植), 오홍탁(吳洪鐸) 등과 함께 논의를 거듭하다 먼저 농민운동에 착수하여, 적색농민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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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배(金洪培)

황동윤은 완도에서 이기홍(李基弘), 조동선(趙東善), 문승수(文升洙) 등과 모임을 갖고 이론투쟁을 전개하며 조선운동은 농어산촌에 주력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보고 농민운동에 집중했다. 김홍배그룹과 황동윤그룹은 해남과 완도에서 각각 활동하고 바다로 격해 있었지만 점차 서로의 활동을 인정하며 협력했다. 마침내 이들은 전남 일대의 활동가들과 연락을 취해 전남운동 최고기관을 조직하기로 정했다. 이들은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에서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및 무산자해방운동을 진행하기 위한 지도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전남운동협의회’라 명명했다. 이 협의회 중앙부는 사무부 김홍배, 조직부 오문현(吳文鉉), 조사부 황동윤(黃同允), 구원부 이기홍(李基弘) 등 4명으로 구성했다. 
전남운동협의회 중앙부는 1933년 8월 11일 제1차 회의를 해남 대흥사의 심적암 부근에서  진행했다. 김홍배의 초안을 바탕으로 8대 운동방침을 정했다. 농촌 각 마을에 2~5명씩 농민반, 청년반, 소년반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 하부조직을 바탕으로 면단위의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그 후에 군단위 녹색농민조합을 세우는 방침을 정했다. 전남운동협의회 중앙부는 제2차 회의를 해남 미황사에서 그해 9월 중순에 진행했다. 한편 10월 하순에는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제3차 회의를 진행했다. 이들은 군 단위별 적색농민조합을 영암, 장흥,  강진, 해남, 완도 등 5곳에 설치키로 하고 면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들은 운동전선을 농민운동에 국한하며, 농민운동 지도기관으로 각군에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 이를 위해 하부조직 확보를 위해 농촌 각 마을에, 2명~5명규모의 농민반, 청년반, 소년반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장흥에서는 조선일보 장흥지국기자 김두환(金斗煥)과 조선일보 장흥지국장 문용(文鏞, 영암출신)이 장흥지역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을 맡았다. 이기홍의 회고록에  따르면 영암지역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 책임자는 최규문(崔圭文)이었다. 최규문은 최문장(崔文章) 등을 영암 구림지역 인사들을 동지로 규합했다. 이기홍은 강진에서는 윤가현(尹珂鉉)을 강진지역 적색농민조합 준비위원장으로 맡기고 동지 규합을 촉구했다. 이 밖에도 성진회(醒進會) 출신 왕재일(王在一, 구례 출신) 등도 광주에 머무르며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했다. 이렇게 하여 주축은 김홍배, 황동윤, 이기홍, 왕재일, 유재성, 오문현, 윤기현, 마성만, 최규문, 김두환 등으로 확대된다. 한편 전남운동협의회 중앙부는 기관지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등사판인쇄 잡지로 발행하고, 만일을 대비해 해남과 완도의 농민조합명의로 인쇄물을 각각의 농민반에 배포했다. 1933년 10월 창간호가 발간했고, 12월에 제2호를 발간했다. 1934년 1월 중순 강진 노동야학에서 검거가 시작되자 <농민투쟁> 발간을 중단했다. 그러나 기념일이나 축제일 등에는 반드시 선전문 혹은 반대격문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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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5월부터 이듬해까지 9개월간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 시기에 이들은 적색농민조합 53개소를 조직하고, 18개소를  결성 중에 있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온건한 지방교화단체를 표방했으나, 이면에는 지주와 자본가 세력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옹호하고자 했다. 경찰순사가 된 오홍탁(吳洪鐸)을 통해 경찰관서와 제휴하고, 농민들의 이익옹호를 위한 야경단을 26개나 조직했다. 한편 노동야학 및 농민야학을 총 28개소나 설치했으며,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하는 가운데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수하기도 했다. 
특히 전남운동협의회는 지도부의 책략으로 소작쟁의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김홍배는 2백여석을 추수할 정도로 부호였고, 농장 간부를 겸하고 있어서 관헌이나 구장이나 진흥회장들에게 상당한 영향력도 있었다. 그는 전남운동협의회를 통해 농민들을 교양하면서 소작쟁의를 일으키도록 이면에서 지도하고, 소작인대회를 개최해서, 자신은 일반지주를 대표하여 출석해, 소작인들의 요구조건을 받아줬음으로, 다른 지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최규문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영암지주이자 담양 창평 출신 고제섭의 매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6개월간 투옥된 바 있다. 그는 면서기들과 함께 농촌진흥회에 참여해 합법적 농민조합을 규합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야경단을 조직해 일경의 감시를 약화시킬 수단으로 활용했다. 전남운동협의회가 처음 노출된 것은 1933년 9월 강진 병영면 경관주재소 방화사건 때였다. 사건 직후 동아일보 병영지국장 방태섭이 용의자로 체포되지만 실제 방화자는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3년 12월 연말 강진군 군동면 청년회원 12명이 망년회를 하다가 강진경찰서 고등계 형사 윤금죽과 말싸움을 했다. 이를 빌미로 청년들을 체포해 조사하고 동지계(同志契)를 적발해 전남경찰부에 보고했다. 전남경찰부는 이들 청년들의 집안을 조사해 5명의 집에서 맑스주의 서적을 발견했다. 이 서적은 고금도 청룡리에 사는 이현열(李顯烈)이 일본서적상을 통해 수입한 책을 조카 이기홍에게 준 것이지만, 이기홍은 강진에 있던 친구 윤가현에게 이 책을 윤독하도록 했고, 윤가현이 강진청년들에게 전달했던 책이었다. 이 사건으로 1934년 1월 22일 윤가현 등 12명이 체포되고, 배후인물로 이기홍을 비롯한 비밀결사가 있다고 추정하고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한편 해남에서도 1월 하순경에 북평면 해태조합 분규사건으로 전남운동협의회의 핵심인물인 김홍배, 오문현 등이 검거된다. 당시 일경은 김홍배의 가택에서 전남운동협의회의 기관지 <농민투쟁>을 적발했다. 결국 이 사건은 전남도경 경찰부로 이관되어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34년 2월 27일 경찰경찰부 고등과의 지시로 강진, 해남, 완도, 장흥, 순천, 영암 등지로 수사망이 넓혀지면서 총 558명이 체포되었다. 사건관계자는 무려 3천명에 달했다. 8개월간 조사 끝에 1934년 9월 9일 전남운동협회 관련자 247명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목포검사국에 송국했다. 김홍배 이하 237명은 구속된 상태였고, 나머지 10명은 수배상태로 예심에 회부했다.
1933년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큰 사건이다. 그런데 재판과정은 몇가지 큰 파장을 낳았다. 그 중에서 최판옥의 전향은 큰 충격이었다. 최판옥은 ①1920년 영암청년회를 결성해 활동했고, ②1924년 6월 14일 영암노농회를 창립했으며. ③1928년 제4차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예심이 2년이상 미루어 졌다가 1930년 12월 22일 경성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석방된다. ④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조직 결성과정에서도 중심인물 중 한명이었다. 그만큼 영암지역 청년에게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33년 9월 목포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암적색노동조합’관련 재판과정에서 최판옥은 돌연 일본공산당 지도자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전향(轉向)에 영향을 받아 사상전향서를 낭독했다. 당시 재판정에서 유혁과 김판권 등은 “사상전향자는 우리의 동지가 아니라 적이라며, 최판옥과 자신들을 분리 심리하라”고 요구해 공판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재판에서 유용희, 김판권 등은 징역 5년을 받았고, 최규창은 징역3년, 미결구류일수가 넘쳐 최석호, 최동림, 최동환 등은 불구속공소하고 최동관, 신용주, 신용점, 최만년, 문사훈 등은 모두 대구형무소로 이송했다. 한편 사상전향서를 낸 최판옥을 만기복역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석방되어 전북 장수군청 산하 삼림주사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말에도 지속되었다. 구림출신의 박현채(朴炫埰)는 1943년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무등독서회를 결성했다. 연합군의 상륙이 진행되면 내부에서 호응하여 일제의 패망을 촉진하기 위한 봉기를 기획한 것이다. 그러나 1944년 10월 거사계획이 발각되면서 관련자 전원이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들은 재판을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거나 최소 7~8개월간의 옥고를 겪다가 석방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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