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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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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09-04 20:33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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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영보만세운동의 배경과 성격

[2018. 1. 19 / 제155호] 영암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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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영보정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전남도의회 경제복지포럼(대표 우승희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항일독립운동 인정을 위한 지역적 운동이 시작됐다.
2015년 8월 12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며 분신 순국한 당시 81세 최현열 선생은 덕진면 영보리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의 아들이었다. 최병수씨가 참여한 영보항일만세운동은 구시대의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산주의 민중봉기로 비하되며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암우리신문은 영암지역의 항일운동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남대학교 김홍길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의 글을 연재한다

  

<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3. 1920년대 영암지역 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4. 1930년대 영암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남노농협의회’
  2) 영암 영보정 만세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3)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 사건
  4) 전남운동협의회와 영암지역 항일운동
5. ‘치유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뒤엉킴의 실타래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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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홍길 연구실장

영암지방 항일운동은 아직까지 제대로 재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영암지역은 구한말 의병운동에서 일제말기까지 숱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기록이 역사의 저편에 남아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암일대는 일제의 전남지방 식민화과정에서 빠르게 편입된 지역이면서도 향촌공동체적 전통이 유지되면서, 이를 항일의 자원으로 활용한 바 있다. 1930년대 영암에는 전남지역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항일적색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영보만세운동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적색농민조합운동은 오래 가진 못했다. 식민지공간의 재편(대공황, 만주사변), 전시체제의 출현, 전향사회주의자의 출현으로 소작쟁의운동은 한계가 명백했다. 강력한 식민지배구조의 존속 속에서 만주지방과 같은 해방구는 실현할 수 없었다. 
영보만세운동은 메이데이투쟁에서 비롯된 소작쟁의항의운동이면서도 동시에 영암지방 농민들이 식민지 계급의식을 자각하고, 항일을 위한 사상적 고취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분명 적색농민운동에 있어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이후 영암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 항일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광주학생운동 참여세대가 각종 사회운동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33년 5월부터 1934년 사이에 활동했던 전남운동협의회 참가자들 중에서는 이기홍, 문승수, 최규문, 왕재일 등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투옥된 경험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다. 
해방후 건준 영암지회가 형성될 때 조극환, 이창희, 문학연, 최상호, 최규문, 조사원, 김필재, 최규동 등은 신간회 영암지회, 광주학생운동, 영보만세운동을 비롯한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전남운동협의회 관련자들이다. 그만큼 영암지역의 근대항일운동의 역사에서 이들 시기의 항일운동이 차지하는 위상이 막강함을 보여준다. 
이 연구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세대들의 역사적 활동에 대한 국가적 응답이나 사회적 관심이 여전히 미미하다는 점이다. 해방직후 좌우갈등, 한국전쟁기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영암지역 항일운동에 대한 재조명은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결국 영암지역에서 전개된 해방전의 항일활동은 해방후의 비극과 학살의 언덕에 가로막혀 있다. 특히 당대의 기억과 기록을 간직한 세대나 증언자들도 해방 72년을 맞는 지금 태반이 사망함으로써, 역사적 재조명은 더욱 더 많은 시간적 한계와 장벽을 안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해방후 영암지역에서도 비극과 수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해방 초기 좌우갈등과 한국전쟁을 계기로 더욱 심화된 갈등은 당시의 비극과 상처들은 매우 큰 것이다. 해방직후 영암은 좌익항일운동의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의 성격이 재연되었다. 좌익세력이 강했지만 제헌의회에서는 민족주의 인사가 당선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우갈등은 다시 재연된다. 좌우익간의 충돌로 무고한 민간인들은 낮에는 경찰에게, 밤에는 빨치산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받았고, 일부는 보복성 살해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전쟁 직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암경차른 보도연맹원들을 영암읍 마을회관에 소집시키고 집단방화시켜 죽인 바 있으며,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빨치산들도 보복행위를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빨치산부대는 10월 7일 군서면 구림리에서 기독교신자와 경찰가족을 포함한 28명이 학살당했다. 10일후에는 군인과 경찰이 역으로 마을주민을 한데 모아 학살하기도 했다. 1951년 1월에는 빨치산활동을 접고 투항했던 140여명을 군인들이 금정면 일대의 방공호에 몰아넣고 학살하는 참극도 일어났다. 
이러한 상처는 단기간에 해소될 수 없었다. 항일운동과정에서 고난을 겪었던 영암출신의 많은 이들이 맞이한 해방은 사회적 분열에 멍들었다. 민족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이들에게 광복직후의 혼란과 동족상잔의 비극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영암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던 최규문도 건준 영암지회 부위원장을 지냈지만, 한국전쟁 시기에 경찰에게 피살당했다. 
분단과 이념의 극단적 갈등이 씌운 멍에는 많은 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사라져갔다. 보도연맹, 빨치산, 군인 경찰 이란 이유로 자행된 비극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평생 한과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도 많았다. 영암주민들은 2006년 마을에서 시작된 비극을 마을에서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잔혹했던 과거사를 치유와 화해로 해결해 보려는 시도였다. 좌우학살의 상처를 안고 있는 냉천마을과 연보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자리에 ‘용서와 화해를 위한 6.25희생자위령탑’이 세워졌다.

영암우리신문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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