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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백년, 위대한 유산,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일보, 2017.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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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10-19 14:23 조회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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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광복과 해방이 유일한 희망의 언어로 사용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을 염원한 세대가 떠나고 새로운 세대가 연달아 자리를 대신하면서 그 세대의 기억은 빛바랜 역사가 되었다. 다가오는 2019년은 3.1운동 백주년이자,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이 된다. 그 시대의 10대 청년세대가 이 땅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한때 뜨거웠던 항일세대의 기억은 쇠락했다. 한일관계의 앙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방 72주년이 되었지만 한일관계에는 여전히 과거에 그림자에 갇혀있다.

 

숱한 파란에 표류한 현대사 속에서 그 많던 독립운동의 증인세대와 많은 흔적들도 사라졌다. 역사는 여러 사건의 집합체로 기록으로 남겨진 지식이 모든 사실을 말하진 않는다. 때론 집단의 역사와 기억들도, 단편적 지식이나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특정 사건이 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현상도 적지 않다. 여러 사실이 중요도에 따라 재배치되거나 주변적 지식으로 내버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누가 지식의 경중을 정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때 중요치 않게 간주된 지식이 다음 시기에는 오히려 긴요한 지식으로 간주되는 일도 많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기록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참여의 범위의 문제다. 현재까지 국내에 널리 알려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즉 역사적 실체와 면모를 제대로 규명도 하지 못한 채 묻혀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이 점에서 광주학생운동은 소위 펙트 체크가 많이 필요하다. 특히 광주학생운동의 주체, 성격, 지역적 범위, 영향확산 등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조명은 특히 필요하다.

첫째,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세대는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일단 당시의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의 위치와 결부되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각지에서 아이들이 나고 자랐다. 특히 1890년대 말에서 1910년 전후의 출생자들은 생애의 전반기를 식민지백성으로 규정되어 성장한 제1세대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3.1운동을 보고 자란 키즈(kids) 세대들이다. 이른 아이들은 3.1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고, 약간 늦은 세대들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제 36년을 통째로 경험하고 30대후반에서 40대의 나이로 해방을 맞이했던 해방기의 아버지세대였다.

 

둘째, 식민지시대 학생운동은 어떤 의미였고,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가 심혈을 기울인 분야중 하나는 학교였다. 학교는 조선청년들을 식민지적 굴레에 종속시키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학교야말로 저항하는 청년의 요람이었다. 특히 3.1운동이 보통학교, 서당, 사립학교, 종교학교, 전문대학 등을 바탕으로 항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면,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중반이후 확산된 신흥사상 및 민족운동에 기초한 훨씬 조직적인 수준의 보통학교, 중등학교에서의 항일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광주학생운동은 나라를 잃어버린 세대들이 스스로 자유를 향한 수단이 민족의 독립에 있음을 자각시킨 사건이었다. 식민지적 압제는 자치주의나 내선일체외 같은 식민지회유론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의 끝이 독립이라는 절대과제의 해결 없이는 해소될 수 없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은 명칭에 있어 광주학생운동이라고 표현되었지만, 그 맥락이 가진 이중성을 고려해야한다. 일제당국은 당시 어떤 사건이 발발하면 그 사건의 발발지역을 위주로 사건을 규정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 준용할 경우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을 전후로 1926년부터 1934년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발생해 일어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학생독립운동의 지역적 범위를 광주에 한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광주학생사건 역시 운동의 주체가 학생에 국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동안 광주학생운동은 크게 협의적 개념과 광의적 개념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좁은 의미에서 광주학생운동은 광주와 목포, 나주, 여수 등의 전라남북도 일대의 학생운동이 연계된 학생운동으로, 재판의 관할청은 광주지방법원이 담당했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은 광의적 의미에서 전국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이었다. 운동의 참여주체와 계층적 범위 역시 학생 뿐만 아니라 청년, 일반인, 항일지도자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광주학생운동관련자들의 재판은 서울, 대구, 평양, 대전 등 여러 지방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렇게 볼 때 광주학생운동은 광주학생사건(학생시위와 비밀결사), 19301월에 일어난 경성학생사건, 여학생만세운동,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형태의 학생시위와 비밀결사활동을 포괄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공간적 범위나 시간적 구분 또한 어려움이 존재한다. 1927년 이후 결성된 신간회나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이나 조선학생전위동맹, 학생혁명당, 혹은 1930년대 초반의 반제독서회는 모두 광주학생운동과 직간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다. 게다가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 형성되고 있던 학생자치회나. 유학생들에 의한 친목회, 지역청년회도 관련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는 규정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은 모두 식민지공간에서 항일운동의 중요거점에 학생계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국내외의 유학생집단과 지식적 엘리트로서 지역별 중등학생의 유기적 연계와 역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협의적 접근이지만 광주학생운동세대는 일제말기 전남지방 농민운동, 청년운동, 교육운동, 여론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세대들은 일제말기의 수난과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면면히 활동을 지속했고,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비록 해방후 이념과 분단 상황 속에서 활동상이 조명되지 못했고, 오랜 세월동안 잊혀진 세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의 전통은 해방후 성장한 세대들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학생운동은 제반 민족문제, 민주주의문제, 학원자유화 등의 첨병적 역할을 반세기 이상 수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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