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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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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09-04 20:15 조회2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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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5 / 제153호]영암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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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영보정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전남도의회 경제복지포럼(대표 우승희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항일독립운동 인정을 위한 지역적 운동이 시작됐다.
2015년 8월 12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며 분신 순국한 당시 81세 최현열 선생은 덕진면 영보리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의 아들이었다. 최병수씨가 참여한 영보항일만세운동은 구시대의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산주의 민중봉기로 비하되며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암우리신문은 영암지역의 항일운동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남대학교 김홍길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의 글을 연재한다.

 

<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3. 1920년대 영암지역 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4. 1930년대 영암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남노농협의회’
  2) 영암 영보정 만세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3)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 사건
  4) 전남운동협의회와 영암지역 항일운동
5. ‘치유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뒤엉킴의 실타래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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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홍길 연구실장

전남노동협 재건운동은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뒤에 전개된다. 이 사건에는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임종근(林鍾根), 김부득(金富得), 유치오(兪致五), 허재환(許在煥), 임주홍(林周弘), 이형우(李亨雨) 등이 주축이었다. 김부득은 1928년 6월 광주고보 5학년 재학당시 맹휴주동자로 퇴학당하고 그해 8월 동경으로 건너가 전협계열의 관동자유노동조합에 참여해 사상운동을 전개하다 1932년 동경에 있는 신주꾸 직업소개소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상해죄로 6개월간 수감한 뒤 석방되어 귀국한다. 유치오는 1928년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서 일본대학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해 재학중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의 후배들이 동경으로 와서 유치오하숙집에서 은거했으며, 광주농업 재학당시 비밀결사에 참여한 사실이 발각되어 전남경찰 출동 형사들에 의해 1930년 4월 경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그후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1년을 받고 그해 8월 28일 광주형무소를 출소했다. 

임종근은 광주사범학교 졸업후 무안군 비금공립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는 원래 사범학교에서 재학당시 공산주의사상에 심취해 활동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 및 출판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박고, 그해 12월 14일 광주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그는 출소한지 얼마 후에 옥중에서 고초를 함께 했던 유치오와 만나 광주읍 부동정 거리에서 만나 장래에 대해 나누고 사회주의운동을 위한 활동방향을 결의한다. 그후 1932년 8월 임종근, 유치오, 김부득 등이 모여 광주군 효천면 덕남리 금당산에 모여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을 협의했다. 이들은 일제로부터 해방, 사유재산제도 부인 및 공산제 사회 실현이라고 설정했던 전남노농협의회를 완전히 공감하고 있었고,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조직을 재조직하려 했다. 
이들은 1932년 9월 강석원(姜錫元), 오쾌일(吳快一), 유찬옥(柳燦玉), 최종수(崔鍾洙), 이영범(李永範) 등과 연락을 취했고, 임종근, 유치오, 김부득은 1932년 9월 25일 광주 제2공립보통학교 부근에서 회합했는데, 김부득은 광주를 중심으로 동지를 모집하기로 했다. 한편 일제 경찰 당국의 감시망이 좁혀지면서, 임종근, 유치오 등은 검거를 피해 경북 달성군으로 피신했으나 3일만인 1932년 9월 28일 체포되었다. 
임주홍은 1928년 광주고보 4학년때 맹휴로 인해 퇴학을 당했으며,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고,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체포되어 1931년 6월 징역1년을 받고 1931년 12월 24일 광주형무소를 출소했다. 그는 친구 최규문과 그의 처 고애순을 통해 공산주의론을 가르쳤다. 그후 고애순이 근무하는 전남잠업취재소에 독서회를 조직하고, 여공인 서옥련, 김희미 등을 독서회원으로 조직하고 이들에게 단결을 가르쳤다. 이형우는 광주고보 2학년때 광주학생사건으로 투옥 되고, 1931년 10월 30일 출소한다. 그는 임종근과 평소 상의를 하여 순천을 중심으로 보성, 구례, 곡성, 광양 등의 각군에 동지를 수집하고, 적색농민조합을 건설할 것을 결의한다. 이형우는 순천, 보성, 여수, 장흥 등지를 돌며 동지획득을 진행했다. 이처럼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다수의 인물들이 긴밀하게 관여된 것으로, 상당수가 전남노농협의회의 취지에 공감해 활동하다가 체포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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