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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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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연구소 작성일18-09-04 20:19 조회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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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방 적색항일운동의 재조명 - 1932년 영보만세운동의 배경과 성격

[2017년 12월 8일 / 제149호]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영보정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전남도의회 경제복지포럼(대표 우승희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항일독립운동 인정을 위한 지역적 운동이 시작됐다.
2015년 8월 12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며 분신 순국한 당시 81세 최현열 선생은 덕진면 영보리 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의 아들이었다. 최병수씨가 참여한 영보항일만세운동은 구시대의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산주의 민중봉기로 비하되며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암우리신문은 영암지역의 항일운동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남대학교 김홍길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의 글을 연재한다.

 

<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영암지역 향촌조직과 항일 농민운동의 배경


3. 1920년대 영암지역 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4. 1930년대 영암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전개
  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남노농협의회’
  2) 영암 영보정 만세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3)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운동 사건
  4) 전남운동협의회와 영암지역 항일운동
5. ‘치유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뒤엉킴의 실타래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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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대 영암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의 출현

▲ 전남대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 홍 길 연구실장

(1) 영암청년회와 영보강습소, 구림학우회


3.1운동이후 영암지역에서는 청년, 고학생, 부녀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운동이 전개된다. 1920년대 덕진면 영보리에서는 영암청년회가 주도하는 노동야학회가 운영되었다. 1922년 가을에 農德靑年會에 의해 노동야학회가 운영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영보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야학회가 진행된다. 보통학교와 강습소를 통해 성장한 농촌청년들은 각지에서 점차 항일운동의 인물로 성장한다. 1923년 영암흥학회(靈巖興學會)를 조직하여 영암지역의 노동야학회를 총괄해 운영했다. 영암학술강습소는 1922년 10월 11일 개학했으며, 1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강사로는 한동석(韓銅錫), 조극환(曺克煥), 김준오(金俊午), 최희중(崔喜重), 김동호(金東鎬) 등이 참여했다. 한편 학교와 강습소를 통해 성장한 학생들은 친목회나 유학생회, 호남학생친목회, 재경영암유학생회, 재외유학생회 동경지회 등을 조직하거나 참여하기도 했다.

김준연(金駿演)은 영암읍 교동 태생으로 어릴 때는 英明齋에서 文明欽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비범한 영재였으나 13세 때인 1908년 영암보통학교가 세워지자 입학했다가 월반해서 졸업했고 1910년 한성고보(경성고보)에 입학한 뒤 경술국치를 당했다. 경성보고 재학중 망국의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 1914년 졸업후 正則學校 3학년에 편입했다가 오카야마(岡山)현 第6高에 편입한 뒤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호남유학생친목회에서 활동했으며, 1919년 동경YMCA청년회 부회장을 맡았다. 2.8운동을 주도한 뒤 일본에 남아 동경유학생학우회 총무와 회장를 지냈다. 1920년 유학생 하계강습회로 교육운동을 주도했고, 동경제대를  졸업후 귀국한 뒤 ‘朝鮮農民社’를 조직했으며, 1921년에는 독일베를린대학에 유학했다. 1925년 귀국후 조선일보 기자가 되고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지만 제3차 조선공산당의 재건 책임자로 체포되어 ML당 사건으로 7년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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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극환(曺克煥)

조극환은 1920년대 이후 목포를 중심으로 목포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및 신간회활동을 전개했다. 조극환은 1924년에는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무산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무산청년회는 조극환, 강석봉, 배치문, 박승억등이 가담했다. 그는 서울청년회 인물과 교우했고 나주출신 이항발 등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무안과 목포지역 청년단체 연합운동을 위해, 무목청년연맹을 조직했는데, 이것은 목포, 암태도, 비금도, 도초도, 자은도, 임자도, 무안 해제, 지도 등 8곳의 청년회를 묶어 청년들을 가르치고, 각종 강연회와 노동야학을 진행했다. 조극환은 1925년 오도근, 배치문, 김영식, 서병인, 박제민 등과 사상단체인 전위동맹을 조직했다. 조극환은 목포지역 노동운동에 집중해 목포부두노조를 결성했으며, 목포노동총동맹 대표를 맡아 전남최대의 파업투쟁인 목포제유노조파업에도 개입한 바 있다. 한편 그는 1926년 9월 제2차 조건공산당이 재건되자, 그는 김준연과 김재명, 강석봉 등의 권유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목포지역 조직책을 맡았다. 그후 1927년 좌우합작 조직 신간회가 창립되자 제3차 조선공산당의 정책을 따라 신간회 목포지회 상무간사를 맡았다. 그는 1929년 봄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으며, 1930년 12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932년 8월에 석방되었다. 그후 조극환은 1934년 동아일보 진도지국장으로 5년간 진도에 살았고, 1938년 목포 죽교동에서 살다가 1940년대 영암군 군서면 이화정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후 건준 영암지회 위원장과 영암군수로 추대되지만, 미군정에 의해 정권탈취음모로 억울하게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각지에서는 청년회가 빠르게 조직되었다. 영암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영암지역에서는 각종 농촌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청년운동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각종친목회, 체육회, 유학생학우회 등과 같은 여러 층위와 결합되어 외연을 확장했다. 1920년 영암지역 사회운동의 주력은 청년운동이었다. 1920년 7월 영암청년회가 결성된다. 1920년 7월 21일 영암 열무정에서 영암청년회는 김자명(金子明)을 회장으로 하여 출범했다. 그후 한동석(韓銅錫), 김준오(金俊午) 등이 청년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여기에는 최판옥(崔判玉) 등도 참여했다. 당시 한동석은 동아일보 기자였고, 영암청년회는 1920년 8월 9일 동경제대를 졸업한 김준연군 환영회를 개최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영암청년회는 1923년까지도 민족주의성향의 단체였으며, 1922년 7월 9일 강진청년회와 친선 정구시합을 치르기도 했다. 1923년 영암소년단 창립을 지원하고,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운동으로 낭남학원(廊南學院)을 세웠다. 
1924년 영암청년회는 노동부를 설치하고, 조선청년총동맹에도 가입했다. 1925년 9월 영암청년회는 간부를 재선해 서무부에 한동석, 조병은(曺秉恩), 한상길(韓相吉), 교양부에 김준오(金俊午), 이원우(李元雨), 최희중(崔喜重), 노동부에 김동호(金東鎬), 최판옥(崔判玉), 조사원(曺士元) 등을 선임한다. 특히 청년회가 소작인문제에 관여하고, 소작운동과 ‘머슴회’조직에 관심을 두면서 점차 계급의식을 강조하는 신흥학문이 빠르게 강습의 테마로 부상한다. 영암청년회는 청년과 농민들을 교육시키며 영암사회운동의 중추로 성장한다. 영암청년회의 영향을 받아 영암지역에서는 영암노동소년단과 영암노농회도 조직된다. 1925년 3월 영암노동회가 결성되자 최판옥과 한동석이 상무위원을 맡았다. 이들은 1925년 5월 동맹파업을 주도했다. 그해 10월 9일 도초소작회의 소작쟁의를 격려하는 전보를 보내고, 동정연대운동을 전개했다. 영암에는 영암노동소년단이 조직되었는데, 무산소년교양과 소년 노동문제 등에 대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영암청년회의 영향을 받아 1921년 영보강습소가 들어서 어린 학생들에게 배움터로 활용되었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 1일자 기사에는 영보강습소에서는 강습생 80여명이 면학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0년대 전국 각지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어용적인 ‘조선인 소작인상조회’가 나타났다.  소작인상조회는 ‘소작인의 보호와 지도, 지주소작인의 상호 이익을 증진’이라는 목표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소작농들의 권리를 대변하지 못했다. 소작인상조회 전남지회는 1922년 3월 설립되었고, 영암에서도 거의 동시에 세워졌는데, 1,800명의 조합원을 확보했다. 그런데 소작인상조회는 군수나 지주 등이 대부분 간부를 독차지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도 전남지방에서 가장 왕성한 소작쟁의가 진행된 곳은 순천과 광주 등지었다. 반면 영암과 영광은 소작인회나 작인조합이 약해 1920년대까지 전남지방 중에서 소작쟁의가 적게 일어났다. 1923년부터 1924년 사이에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영암지역 영암청년들도 소작문제 해결을 위한 청년활동을 전개한다. 유혁(柳爀, 1892-1966)은 악덕 지주의 빈번한 소작권 이동에 대항하기 위해 영암지역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조선인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소작농운동을 위한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1924년을 전후로 전남지방 농민운동도 사상운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북성회계열은 광주노농공제회와 진주노농공제회를 통해 1923년 9월 14일 조선노농총동맹회를 조직했다. 78개의 단체를 망라한 전라노농연맹회는 서정희(서정희)와 김종범(김종범) 등 북성회계열에 의해 조직되었다. 1925년 2월 유혁, 김재명 등은 전남해방운동자동맹을 조직한다. 한편 서울청년회는 1925년 4월 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위원회를 개최했다. 
영암지역은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극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영암청년회의 주요 책임자 가운데 한명인 최판옥은 영암보통학교 출신으로 조극환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영암청년회, 영암무산청년회, 영암노동회는 서울청년회계의 영향을 받았다. 최판옥, 김판권, 유혁, 최규창, 최상호 등은 1932년 영암공산주의협의회를 결성한 주력 인물들이었다. 

1925년~1928년 전남지방 사상운동과 신간회운동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서정희 등이 이끄는 노동공제회와 김재명이 이끄는 광주청년회는 노선상의 갈등을 보인다. 북성회계열 사상단체인 ‘解放運動史’는 의 핵심 7인중 한명이던 김재명은 1925년 광주청년회 창립 5주년 강연회에서 ‘현실과 청년’이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나주 궁삼면 주민들의 ‘토지회수운동 동맹’결성식에 광주청년회 대표로 파견된다. 김재명은 1926년 2월열린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총회 집행위원이 된다. 고려공산청년동맹(서울계) 중앙위원에 피선된다. 1926년 9월 광주사회운동연합체인 ‘광주협회’ 결성식에 참여하고, 사상단체 신우회(新友會)에서 ‘재광주사회단체대표자간친회’ 준비위원이 된다. 1927년 2월 김재명은 강석봉, 유혁 등과 조선공산당 전남도위원회를 조직하고 선전부원을 맡으며, 고려공산당 전남책임비서를 맡았다. 이 시기에 강석봉의 인척인 지용수(池龍洙), 강해석(姜海錫), 소진호를 고려공청 당원으로 가입시켰고, 조직 확대를 위해 학생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신간회 영암지회는 10월에 설립된 광주신간회 보다 빨리 성립되었다. 1927년 8월 20일 신간회 영암지회가 결성될 때 그 실무를 맡은 주축은 전남청년연맹에 소속된 영암청년회였다. 회장은 김민규(金敏奎, 3.1운동), 부회장은 김상학(金相鶴, 3.1운동)이 맡고, 한동석(韓銅錫), 하헌훈(河憲勳), 조치환(曺致煥), 최헌(崔憲), 손길조(孫吉祚) 등이 총간사를 맡았다. 그 중에서 상무간사는 하헌훈(申敏燮), 신민섭(申敏燮), 최기동(崔基東), 이순명(李順明)이 선임된다. 실무간사는 신도일(辛道一, 야학운동), 김동렬(金東烈), 조만암(曺萬岩) 등이 맡았다. 총간사 한동석(韓銅錫)은 동아일보 광주지국 영암지사 기자로 신간회 영암지회 분회장도 겸직했다. 한동석은 구림과 영보일대에 ‘靈巖靑少年會’를 조직했으며, 1929년 12월 22일 신간회 영암지회 임원선거 당시 감사위원장도 겸하게 되었다. 신간회 영암지회 상무간사이자 재외영암유학생회동경지부 집행위원 최기동(崔基東), 곽동석, 하헌동(河憲東), 조사원(趙士元) 등 영암청년회계열이 신간회의 주축을 이룬다. 
유혁은 신간회 목포지회에서 조극환 등과 활동했고 상무간사를 맡았다. 그는 김재명(金在明), 강석봉(姜錫奉) 등의 ML계열 인사들과도 긴밀하게 활동했다. 유혁은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 창립대회에 참석하며, “사회운동과 신간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시기에 김준연과 김재명(金在明, 1901-1930) 등의 추천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목포 야체이카에 소속된다. 1927년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상무간사로 선출되며, 1928년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된다. 그는 1928년 8월 전남소년연맹(대표 강석원) 창립총회에 참석했다가 해산 명령위반으로 4개월 금고를 받았고, 그해 연말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1929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후 출소후 1931년 9월에는 합법적인 영암농민조합을 추진하다 경찰의 제지로 중단당했다. 유혁은 1932년 4월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하고 외부연락책을 담당했고, 영보시위운동에 참여해 1933년 징역 5년을 받고 복역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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